책읽긴했는데_기억이안나

유시민 작가가 알려주는 글쓰기 방법

DiKiCHi 2018. 5. 11. 10:17

INTRO.

살면서 가장 중요한 기술은 무엇일까요?

여러가지 있지만 저는 ‘글쓰기’라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잘하기 위해서 자기의 생각이 분명해야 하고 지식적으로 풍부해야 합니다. 글쓰기는 한가지 기능이 아니라 다양한 것을 통합하고 융합하여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잘한다는 것은 자신의 분명한 의견과 생각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글쓰기를 못하는 건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글 쓰는 연습을 해본 적이 없어서 아닐까 생각합니다. 

딱히, 글쓰기 연습이라고 해본 적은 없지만 다행이라면 다행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교회에서 형과 누나들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 받았다는 것입니다. 거의 매일 교회에서 생활해서 자주 보는데도 편지를 많이 주고 받았던 것이 연습이라면 연습이었습니다. 대학생 시절에는 핸드폰은 일반화가 됐지만, 연애를 하면 여성분들은 손 편지의 로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환심을 얻기 위해 많은 편지를 썼습니다. 그때는 그 여성분을 어떻게 감동시킬까 고민고민하며 쓴 것이 조금이나마 여러 번 글을 읽고 고치는 과정을 통해 체득된 것이 지금의 제 글 실력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방법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논문을 쓰더라도 주제에 벗어나면 안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주장을 명확히 하는 것과 필요 없는 부분을 과감히 버리는 연습을 하였습니다. 나름 교만하게도 그동안 글쓰기에 대한 배움 없이 체득하는데로 버텨왔습니다. 

하지만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달라졌습니다. 예전에 한 두명이 볼 편지 글도 아니고 여러 사람이 볼 글을 쓴다는 것은 제가 쓴 글에 책임감이 필요해서 몇 가지 글쓰기 책을 봤습니다. 남이 어렵게 터득한 방법을 쉽게 익히는데 책만한 것이 없습니다. 책을 읽었다고 잘 쓰는 것은 아니지요. 지금도 책 내용을 생각하면서 내 글이 못난 글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더 글을 쓰다보면 조금 더 나아지길 바라며, 제가 읽은 글 중 도움이 되었던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이라는 책 내용을 적어봅니다. 

여러분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차, 아시다시피, 유시민작가가 정치적인 성향이 강한 분입니다. 좀 불편한 분들도 있겠네요.

유시민 글쓰기 특강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다른 사람들의 글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SNS나 주변 지인들이 쓴 글들을 볼 때 자신과 다른 의견에 대해 광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SNS는 사실 공적인 사실만을 다루는 곳이 아닙니다.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를 마음껏 피력해도 괜찮습니다. 그런 주관적인 의견과 취향을 논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취향을 두고 논쟁하지 마라]

말이든 글이든 원리는 갔습니다. 언어로 감정을 건드리거나 이성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감정이 아니라 이성적 사유 능력에 기대어 소통하려면 논리적으로 말하고 논리적으로 써야합니다. 그러면 논중하는 방법을 알아야 효과적으로 논증하면 생각이 달라도 소통할 수 있고 남의 생각을 바꿀 수 있으며 내 생각이 달라질수 있습니다.

장미는 가장 이쁜 꽃이다. 이것은 취향 고백으로 논쟁거리가 안됩니다. 개인의 취향을 인정하지 않고 장미가 ‘좋네, 아니네’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죠.

정치적으로 가서 ‘나는 xxx당이 좋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접근하면 안됩니다.

 

위에 내용을 읽다보면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이 생각나네요.

명제가 사실을 담지 못하면 무의미한 문장이고 그것을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다는 것인데요.

유의미한 문장은 과학적인 영역이고, 무의미한 문장은 철학적 영역이며,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한다>며 모든 철학을 까버렸죠.  유시민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이 이런 내용인 것 같습니다. 주관적인 말은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습니다. 

사실을 기반하는 유의미한 글을 논리적으로 써야한다고 하는 것같습니다. 

 

글을 쓸 때 단순한 취향고백과 논증해야 할 주장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이것은 논증의 미학을 구현하는 첫 번째 규칙입니다. 

두 번째 말이나 글로 타인과 소통하려면 사실과 주장을 구별해야 합니다. 

사실은 그저 기술하면 됩니다. 하지만 어떤 주장을 할 때는 반드시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옳은 주장이라는 것을 논증해야 합니다. 논증하지 않고 주장만 하면 바보 취급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구는 태양을 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논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죠. 처음에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은 주장도 누군가 확실하게 증명하고 만인이 받아들이면 사실이 됩니다. 

사실로 인정받지 못한 주장은 반드시 그 타당성을 논증해야 합니다. 사실과 주장을 엄격하게 구별하고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나는 김수현이 대한미국 최고 미남이라고 생각한다.' 라고 주장한다면 먼저 미남의 기준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러면 미남의 기준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받아 들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냥 어떤 근거도 없이 최고의 미남이라고 주장한다면, 근거를 밝히라고 요구는 할 수 있지만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논증하지 않는 주장은 반박할 수 없고, 그런 논증 없는 주장은 주장으로 성립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주장이 아니기 때문에 반박할게 없는 것입니다.

 

논증하지 않고 주장만 하는 사람이 있을까? 불행히도 흔합니다.

여야가 이미 합의한 대로 지난해 12월 29일 국회 본회의 의결을 통해 공무원연금개혁 특별위원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여야 동수로 구성되는 연금개혁 특위는 한 번의 기간 연장을 통해 125일가지 활동한다고 한다. 따라서 늦어도 올해 5월 초까지는 국회에서 공무원 연금 개악을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연금개혁 특위와 함께 국민대타협기구도 90일간의 활동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 기구는 말 그대로 협의와 타협을 위한 기구고, 입법에 대한 전권은 연금개혁 특위가 갖는다. 20명의 국민대타협기구 위원 중 공무원연금 당사자 단체는 여야가 각각 2명씩 지명하는 4명의 대표를 낼 뿐이다. 전공노등 공동투쟁본부의 저항이 얼마나 힘을 발휘할지 모르겠지만, 불행하게도 연금 개악의 결정권은 이제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 두 당에 있다.

개악이라는 말은 고쳐서 더 나쁘게 만드는 뜻입니다. 개악은 사실을 말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주관적인 가치판단입니다. 개혁, 개선이라는 단어로 바꾸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는 논증 없이 주장만 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사실과 논리에 입각해 합리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이 아니리 목소리 크고 힘센 쪽이 이기는 현실에 익숙합니다. 권력자들은 '말 많으면 빨갱이'라는 말로 합당한 논증을 요구하는 시민을 핍박해왔습니다. 부모들은 꼬박꼬박 어른한테 말대꾸한다며 논리적인 주장을 펴는 자녀를 혼냈고, 교사와 교수는 질문하는 학생을 귀찮게 여기거나 구박했습니다. 정당들 또한 사실과 논리와 이성적 추론이 아니라 대중의 감정에 편승해 정치적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논리적으로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월드컵 16강 진출 했을 때 논평입니다.

정범구 의원의 말입니다. '오늘 벌어지는 한미전이 재삼 우리 민족의 저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남경필 의원의 말입니다. '히딩크 감독과 선수들 모두 불굴의 투혼으로 반드시 승리해 16강 진출은 물론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드높여 줄 것을 확신한다.'

이런 논평에 유시민 작가가 대변인들 까는 글을 씁니다. 제목은 "민족은 축구를 하지 않는다" 였습니다. 

대변인들의 전제는 축구 월드컵 성적이 '민족의 우수성'을 측정하는 지표가 된다는 전제입니다. 논평의 타당성 여부가 전제의 옳고 그름에 달려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전제를 따른다면 미국의 월드컵 성적과 브라질의 월드컵 성적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전제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지만 바른말이라도 가려서 해야지 유시민 작가의 논평에 중들의 항의를 했습니다.

 

사실, 감정적으로는 대변인들의 논평을 좋게 느껴지지만 사실 잘못된 글임은 확실합니다. 논증의 미학이 살아 있는 글을 쓰려면 사실과 주장을 구별하고 논증 없는 주장을 배척해야 하면 논리의 오류를 명확하게 지적해야 합니다. 하지만 논증을 모두 좋아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특히 힘과 권력있는 사람들은 특히 싫어합니다. 논증은 평등하고 민주적인 인간관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회장님에 말에 바른말로 대꾸하는 임원을 누가 좋아하겠으며, 대통령과 장관들의 정책방향을 하나하나 타당성을 따지는 공무원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논리적인 글을 쓰기 위해서는 미움 받을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주제에 집중하라]

글을 쓸 때는 주제에 집중해야 합니다. 원래 쓰려고 했던 이유, 하려고 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잊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직선으로 논리를 밀고 가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정에 휘둘리면 안됩니다. 글을 쓸 때 감정에 빠지면 길을 잃기 쉽습니다. 맛 집을 소개하면서 재료나 양념에 대해서 소개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느낀 불쾌함으로 음식전체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감정에 휘둘리면 논리 글을 쓰기 어렵습니다.


<글쓰기 철칙>

 

[글쓰기는 기능이다]

글 재능은 크게 2갈래로 나뉩니다. 문학적인 글과 논리적인 글입니다. 문학 글쓰기는 재능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느끼는 감수성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논리 글쓰기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유시민 작가 같은 경우는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라고 대중을 부추기는 선동, 불법유인물을 만들면서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짧을 글을 통해 사람들을 깨워야 하니 얼마나 고심했을까요. 어째든 그런 노력을 통해서 논리 글쓰기는 가능하다고 합니다. 논리 글쓰기는 연습을 통해서 익힐 수 있습니다.

 

[발췌 요약에서 출발하자]

글쓰기에 철칙은 있습니다.

첫째, 많이 읽어야 잘 쓸 수 있습니다. 

둘째, 많이 쓸수록 더 잘 쓰게 됩니다.

 

어째든 많이 써야 실력이 늡니다. 유시민 작가가 1988년에 '거꾸로 읽는 세계사'라는 책을 냈을 때 이 책은 거의 100퍼센트 발췌 요약이었다고 합니다. 

'발췌'는 텍스트에서 중요한 부분을 가려 뽑아내는 것이고, '요약'은 텍스트의 핵심을 추리는 작업입니다. 발췌는 선택이고 요약은 압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췌가 물리적 작업이라면 요약은 화학적 작업입니다. 효과적으로 요약하려면 정확하게 발췌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발췌요약은 요약입니다.

텍스트를 읽고 핵심을 추려 논리적으로 압축하는 작업입니다. 텍스트를 이해하고 문장을 만들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독해력과 문장 구사력 그리고 요약 능력은 서로 북돋아줍니다. 

독해력이 좋을 수로 요약을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요약을 전제로 텍스트를 읽으면 독해력을 기르는데 도움이 되고, 요약을 열심히 하면 저절로 문장 구사 능력이 발전합니다. 교양서도 괜찮고 소설도 괜찮습니다. 혼자보다는 역시 피드백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더 좋습니다. 

 

살다 보면 자신의 인생을 요약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입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알려주는 정보를 이력서에 적어야 합니다.

이력서는 사실을 적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력서에 어떤 사실을 적을지 결정하는 것은 쓰는 사람이 아니라 읽는 사람입니다. 

기업의 인사담당자는 회사에 도움될 사람을 뽑는다.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정보는 이력서와 부속서류를 보면 된다. 전공이나 성적, 외국어 실력은 이력서에 다 나와있습니다. 자기소개서도 그런 정보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채우면 이력서와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학교와 기업이 구이 자기소개서를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글을 얼마나 잘 쓰는지 보려는 게 아닙니다. 자기소개서를 받는 것은 이력서만 보아서는 알기 어려운 인간적 특성을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보통 인간적 미덕을 가진 사람을 좋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솔직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고, 긍정적이고, 창의성과 열정이 있고, 남을 배려하고, 인내심과 도전 정신이 있는 사람을 훌륭하다고 한다. 자기소개서는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상상하면서 써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과거와 현재를 평가하고 미래를 설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기 인생을 제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대입원서를 내는 학생이라면 자신이 공부하기를 원하며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실을 중심으로 인생을 요약해야 합니다. 기업 입사원서를 내는 청년이라면 자신이 회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으면서 그 믿음의 근거를 제공하는 사실을 중심으로 인생을 요약해야 합니다. 요약하는 사람의 삶과 의지와 태도에 따라 같은 텍스트라도 다르게 요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글쓰기의 철칙 1]

어떤 글이 잘 쓴 글일까요?

시와 소설 같은 문학작품은 객관적인 기준을 세우기가 어려운 반면에 논리 글은 다릅니다. 어느 정도 기준을 정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가 제일 중요합니다.

첫째, 우선 쉽게 읽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어야 합니다.

둘째, 논리적으로 반박하거나 동의할 근거가 있는 글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글을 쓰려면 다음 네 가지에 유념해야 합니다.

1.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주제가 분명해야 합니다.

2. 그 주제를 다루는 데 꼭 필요한 사실과 중요한 정보를 담아야 합니다.

3. 그 사실과 정보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분명하게 나타내야 합니다.

4. 주제와 정보와 논리를 적절한 어휘와 문장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잘 쓴 글의 예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마는? 답은 두창(천연두)균이다. 지구상에 인류가 출현한 이래 세균과 바이러스는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었고, 인류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인간은 그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세균과 바이러스를 통제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고작 200여 년 전부터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사용된 백신은 1879년 겨울 지석영이 충북 덕산에서 처조카들에게 놓은 우두다. 이때까지, 아니 이 뒤로도 한동안 두창에 대처하는 방법은 마마 귀신에게 제발 살려만 달라고 비는 것뿐이었다. 우두는 두창균을 전명시켰을 뿐 아니라 전염병에 대한 무지도 격퇴했으나 모든 전염병이 두창균처럼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20세기 중반까지는 장티푸스, 콜레라, 뇌염 등이 수시로 침습하여 매년 수천 명에서 수만 명에 달하는 인명을 앗아갔다. 

세균과 바이러스의 활동을 억제할 수 있는 백신들이 차례차례 개발되자 백신은 옛날 무당보다 훨씬 강력한 권위를 행사했다. 태평양전쟁 때부터 한국전쟁 직후까지 ‘예방접종 증명서’는 통행 허가증이자 사실상의 신분증으로 통용되었다. 이후에도 1970년대까지는 학교, 군대 직장 등에서 의무적인 단체 접종이 시행되었다. 주사기 한 대로 여러 사람에게 접종하는 과정에서 확산된 간염은 치명적인 전염병에 비하면 ‘새발의 피’ 정도로 간주되었다.

이제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는 통계학적으로 무의미한 수치로까지 줄어들었지만, 아직 유효한 백신을 만들지 못한 세균과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는 여전하다. 조류독감, 신종플루, 에볼라 바이러스 등은 그들의 실질적인 살상력 이상으로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태어나서 1년안에 열차례 정도 백신을 맞고 자라온 현대인들에게 ‘백신 없음’은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방탄복도 입지 못한 채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공포 그 자체다.

이 칼럼은 무엇에 관한 글인지 오인할 염려가 전혀 없습니다. 글의 주제는 인간이 전염병과 벌인 투쟁의 역사다. 주제를 벗어난 곁가지가 없습니다. 적절한 어휘를 다채롭게 활용했고 문장이 자연스러워 읽는 맛이 있습니다.

훌륭한 글은 뜻을 잘 전달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불러내어 냉정하게 해석했을 뿐 직접적으로 감정을 표출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이 정확하지 않다거나 해석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면 정확한 사실과 다른 해석을 제시해 논박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이 훌륭한 것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기 위해서는 다시 말하면, 논리 글쓰기의 첫걸음은 텍스트 요약입니다. 요약하기 위해서는 독해력이 필요하고 독해력을 키우는 방법은 글을 많이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정보와 논리 중에 스스로 창조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지식과 정보, 논리 구사력, 자료 독해 능력, 어휘와 문장, 논리적 글쓰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는 남한테 받는 것입니다. 그 소스가 바로 책입니다. 

[글쓰기 철칙 2]

책을 많이 읽는다고 글을 잘 쓰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철칙은 ‘쓰지 않으면 잘 쓸 수 없다. 많이 쓸수록 더 잘 쓰게 된다.’

앞에 칼럼 글에 시작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마는?’

이렇게 첫 문장을 이렇게 쓰기는 사실 쉽지 않습니다. 첫 문장쓰기는 그저 첫 문장이 아닙니다. 첫 문장을 자신 있게 쓰려면 먼저 글 전체를 대략이라도 구상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어렵지도 않습니다. 일단 내지르고 난 다음에 차분히 설명하면 됩니다. 써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렵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처음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민망한 문장을 붙들고 씨름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유시민 작가 또한 독재시절 민주화 운동 을 하면서 쓴 글을 통해서 훈련을 받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1985년엣 1987년 말까지 약 2년 동안 숱한 성명서, 선언문, 홍보 전단, 핌플릿 등을 썼다고 합니다. 그렇게 훈련하면서 글 쓰는 효율은 점점 늘어갔다고 합니다. 

 

 

[혹평과 악평을 겁내지 말자]

논리적 글쓰기의 첫걸음인 텍스트 요약은 혼자보다는 여럿이 해야 효과가 있습니다. 남에게 평가 받는 것이 싫어서 혼자 움켜쥐고 있으면 글이 늘지 않습니다. 글을 쓸 때는 읽는 사람이 누구일지 미리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글을 쓰고 나면 독자의 반응을 점검하고 타인의 평가와 비판을 들어야 합니다. 요즘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시대에서 살고 있습니다. 돈도 들지 않고 내가 쓴 글을 만인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시간으로 독자 반응을 점검 할 수 있습니다. 혹평도 반갑게 듣고 즐겨야 글이 느는 것입니다. 요즘은 익명으로 글을 쓸 수 있어 비판을 받더라도 인격적으로 모욕감을 잘 받지 않습니다. 좋은 글을 썼다면 수준있는 댓글이 붙기 마련이고, 비판조차도 수준이 높습니다.


<못난 글을 피하는 방법>

‘글쓰기도 노래와 다르지 않다. 독자의 공감을 얻고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 잘쓴 글이다. 많은 지식과 멋진 어휘, 화려한 문장을 자랑한다고 해서 훌륭한 글이 되는 게 아니다. 독자가 편하게 읽고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쓰는 것이 기본이다.’

[못난 글 알아보기]

글을 잘 쓰려면 무엇보다 잘못 쓴 글을 알아보는 감각을 길러야 합니다. 아무리 기교를 부려도 음을 정확하게 듣지 못하면 바이올린을 제대로 연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 쓴 글을 알아보는 감각이 없으면 훌륭한 문장을 쓰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잘못 쓴 글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쉽고 간단한 방법은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입니다. 만약 입으로 소리 내어 읽기 어렵다면, 귀로 듣기에 좋지 않다면, 뜻을 파악하기 어렵다면 잘 못 쓴 글입니다. 

이런 글을 읽기 쉽고 듣기 좋고 뜻이 분명해지도록 고치면 좋은 글이 됩니다. 

 

예를 들어, 담화문을 하나 읽어보겠습니다.

그동안 육상에서의 사회 재난과 자연 재난을 관장하는 부서가 각각 본부조직과 외청으로 이원화되어 있고, 해상에서의 재난은 해수부와 해경으로 분산되어 있어 재난 안전을 통합적으로 기획하고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육상과 해상의 재난, 사회 재난과 자연 재난을 모두 통합하여 국가안전처로 일원화하여 효율적으로 대처하고 철저히 책임 행정으로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안전처가 하루라도 빨리 출범해야 국민의 생명과 안전 보호를 위한 획기적 변화가 시작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의 뜻을 알기 어렵습니다. 소리 내어 읽어보면 더 어렵습니다. 숨 쉴 곳을 찾기도 어렵습니다. 담화문은 국민들에게 들려주는 글인데도 매우 어렵다는 건 이것이 못난 글이라는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로 어두워진 민심을 수습할 목적으로 국무총리가 발표한 담화문인데, 이해가 되야 수습이 될 텐데 국민들이 들어도 이해하기가 어려우니 이 담화문은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담화문은 읽기 편하고 듣기 쉬워야 합니다. 한자말, 일본말, 서양말이 즐비한 글을 읽기 쉽지 않습니다. ‘육상’ ‘해상’ ‘관장하는’ ‘이원화되어’ ‘통합적으로’ ‘일원화하여’ ‘효율적으로‘ ‘획기적 변화’는 모두 한자말입니다. 세 문장인데도 ‘적(的)’과 ‘화(化)’가 붙은 한자말은 다섯 번이나 썼다. 그리고 ‘육상에서의’ ‘이원화되어’ ‘분산되어’ ‘시작 될 수’라는 말도 모두 일본말 조사와 수동태를 따라 쓴 것입니다. ‘본부조직’과 ‘외청’은 시민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관창말’입니다. ‘각각’은 없어도 되는 말이고, ‘책임 행정으로 할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표현이지요. 지금까지 책임이 없었다는 의미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독자의 공감을 얻고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 잘 쓴 글 입니다. 화려한 문장을 자랑한다고 해서 훌륭한 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독자가 편하게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는 것이 기본입니다. 

 

[우리글 바로쓰기]

좋은 책을 많이 읽으면 못난 글과 나쁜 문장에 대한 면역력이 저절로 생깁니다. 유시민 작가는 이오덕 선생의 <우리글 바로쓰기>라는 책을 추천한다. 못난 글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백신이라고 소개하는 책입니다. 백신이 사람을 건강하게 만들어주지는 않지만 해로운 질병을 막아주듯이 못난 글을 구별하고, 못난 글을 쓰지 않도록 면역력을 길러주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오덕 선생은 아동문학 작가이면서 중국 글자말과 일본말 서양말 홍수에서 우리말글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남의 나라말에 오염되어 생긴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우리말과 글이 쓸데없이 어려워졌다.

둘째, 우리말과 글이 흉해졌다.

셋째, 우리말과 글로 생각과 느낌을 바르게 표현하지 못하게 되었다.

외국어

 

[중국 글자말, 토박이말 오남용]

한자말을 쓰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남용될 때는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나라는 오랜 세월 한문을 아는 게 배운 사람이라는 징표로 통했습니다. 유식해 보이죠. ‘사망사고발생지점’은 이상하지 않지만 쉽게 ‘사망사고 난 곳’이라는 더 쉬운 말이 있습니다. ‘사고다발구간’도 ‘사고 잦은 곳’이라는 말로 쉽고 명료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북한처럼 모두 토박이말로 모두 바꾸긴 어렵습니다. 반대로 토박이말을 지나치게 사용하면 의사소통하고 정서적인 교감을 이루는데 장애가 생기기도 합니다. 

 

다음은 토박이 말을 사용한 예이다.

<괴물 한미 FTA와 살 길>

실제로 노 대통령은 전시작통권 소동을 들먹이며 자유무역협정은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다고 언죽번죽 털어놓았다. 그래서일까. 협정 추친에 저라적 민주주의조차 유린됐다는 지적에도 모르쇠다. 대안을 내놓으라고 되술래잡는 다. 진보적 연구소가 곰비임비 대안을 내놓고 있는데도, 한사코 없단다. 공부에 게으르다는 개탄에 그칠 일이 아니다 수천만명의 삶이 걸린 국가적 의제 아닌가.

손석춘 선생은 토박이 말을 쓰려고 애를 썼지만 요즘 사람들은 ‘언죽번죽 털어놓았다’ ‘되술래잡는다’ ‘곰비임비’ 같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신문칼럼은 생각을 알리고 공감을 얻으려는 글입니다. 토박이말 사랑을 실천하는게 아닙니다. 

 

[일본말과 서양말 오염]

한자말 오염은 어떻게 보면 간단한 문제입니다. 한자말 때문에 우리말 문장이 심하게 뒤틀리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일본말이 더 문제입니다. 정치사회적 개념어인 ‘민주주의, 자유, 시민’같은 말은 모두 일본어를 거쳐 들어 왔습니다. 일본어에서 왔다고 해서 다 바꿀 수는 없지만, 일본말이 들어와서 문장을 뒤틀고 뜻을 흐리게 하며 자연스러운 운율을 파괴하는 현상이 위험합니다. 거기에 서양말 문법까지 섞이면 도저히 우리말이라고 하기 어려운 글이 됩니다. 

두 가지를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일본말 토씨(조사)와 피동형문장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일본말 조사를 함부로 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말 조사 ‘の(노)’는 우리말법으로 하면 일곱 가지 ‘격조사’로 쓰이면서 스물한 가지 다른 뜻을 가집니다. の는 우리 말의 ‘~의’와 달리 단순한 관형격조사가 아닙니다. 우리말이라면 전혀 다른 토씨가 들어가거나 토씨가 아예 없어야 하는 자리에도 일본말은 の가 들어갑니다.

우리말이라면 ‘은,는,이,가’ 를 써야 하는 곳에 일본말은 の를 쓰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는 동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 그렇습니다. 우리말법으로는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 되어야 합니다. 작사가도 잘못을 인정했지만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으로의’ ‘에로의’ ‘에서의’ ‘으로부터의’ ‘ 있어서의’와 같이 ‘’를 겹쳐 쓴 토씨도 모두 우리말법에 어긋난 것입니다. 이것은 の가 든 일본식 조사를 옮긴 것입니다. 이런 일본식 조사는 주로 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말까지 그렇게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너무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이런 못난 글을 많이 씁니다. ‘민중의 주인 된 삶’ ‘문학으로의 초대’ ‘고향으로의 귀환’등 모든 미디어에 널려있습니다.

 

피동형 문장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리말에는 피동문이 드뭅니다. 반드시 피동문을 써야 정확하게 뜻을 전할 수 있을 때만 예외로 사용합니다. ‘보여지다’ ‘되어지다’ ‘키워지다’ ‘다뤄지다’ ‘모여지다’ ‘두어지다’ ‘보아지다’ 같은 것은 글 뿐만 아니라 방송에도 출몰합니다. 타동사를 피동형으로 쓰는 것만으로 모자라 자동사까지 억지로 피동형으로 만든 문장은 우리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서양말의 완료시제와 복수형 어미 오남용도 심각한 문제 입니다. 우리말은 완료시제가 없습니다. 없어도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습니다. 현재완료니 과거완료니 하는 서양말 문법은 서양말을 할 때만 쓰면 됩니다. ‘어제 어머니를 만났었다’거나 ‘고향을 방문했었다’는 식으로 글을 쓰고 말을 합니다. 서양말은 주어가 단수냐 복수냐에 따라 동사가 달라지기 때문에 중요하지만 우리말은 명사 그 자체를 복수라고 분명하게 드러내야 할 때가 아니면 복수형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 식으로 추상명사에도 ‘’을 붙여 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단문 쓰기] 

글은 단문이 좋습니다. 단문은 그냥 짧은 문장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길어도 주어와 술어가 하나씩만 있으면 단문입니다. 문장 하나에 뜻을 하나만 담으면 저절로 단문이 됩니다. 주어와 술어가 둘이 넘는 문장을 복문이라고 합니다. 복문은 무엇인가 강조하고 싶을 때, 단문은 뜻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울 때 쓰는 게 좋습니다.

단문이 복문보다 훌륭하거나 아름다워서 단문을 쓰라는 것이 아닙니다. 뜻을 분명하게 전하는 데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단문은 꼬일 일이 없습니다. 

영민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순찰로 계단의 나무 말뚝이 등을 찔렀다. 그는 철책의 쇠그물을 움켜잡았다. 그러나 일어설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몸 속에 무엇인가가 빠져나가 버린 듯 허전했다. 52번 투광등에 불이 들어왔다. 영민은 미소 지었다. 저것 봐. 달이 떴네. 이제 편지를 읽어야지.

좋은 글인지 알 수 없으나 단문을 통해서 소설도 쓸 수 있고 인물의 행위와 사건 전개 상황을 속도감 있게 묘사할 수 있습니다.

 

[거시기 화법]

단문 쓰기만큼 중요한 것이 어휘 선택입니다. 말하려는 뜻을 명확하게 표현하려면 ‘꼭 맞는 단어’를 써야 합니다. 어휘가 부족하면 같은 단어와 표현을 반복해서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글이 지루해지기 마련입니다. 어휘를 늘리는 방법으로는 좋은 책을 골라 되풀이 읽어야 지식과 어휘를 늘릴 수 있습니다.

정확한 단어가 아닌 '거시기 화법'으로는 좋은 글을 쓸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거시기 화법'을 자주 사용합니다. 

자동텐트를 이 가격에 구매하기는 어렵지요 해당 가격에 만족스런 제품입니다. 이부 마무리 부분이 아쉽지만요. 일단 방에서 텐트를 쳐본 모습입니다. 약간 작은 듯하지만 나름 만족스럽지요. 텐트 안에서 보면 불빛이 새는 부분이 있어요. 박음질한 부분들인데. 이런 부분 때문에 비 올 때 제대로 방수가 될는지 의심스럽더라고요. 텐트 문을 묶어주는 끈이 하나가 짧아요. 이런저런 부분들이 아쉬운 점이 있지만 조금만 더 다듬어준다면 좋은 제품이 될 듯하네요.

뜻은 잘 전달 되지만 짧은 글에 '부분'을 다섯 번이나 썼습니다.'부분'을 남발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부분'을 어떤 단어로 대체하면 좋을지 생각해 봄직 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회사의 자체 조사가 덜 끝난 부분이 있어서 제가 말씀 드리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이 말을 고치면 '그 문제 대해서는 회사의 자체 조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이어서 제가 말씀 드리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부분'은 '거시기'와 똑같은 것입니다. 왜 '부분'을 자주 사용할까요? 무엇보다 아는 어휘가 적어서 그런 것 입니다. 대충 뜻이 통할 것 같은 단어라도 넣는 것입니다. 아니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일부러 모호하게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짧은 글쓰기]

어떤 작가는 하루에 원고지 수십 장 분량의 글을 씁니다. 1000 페이지가 넘는 책을 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글을 길게 쓰는 것보다 ‘짧게 잘 쓰기’가 어렵습니다. 짧은 글이 좋은 이유는 똑 같은 정보와 논리를 담는다면 읽는 데 시간이 덜 드는 짧은 글이 효율적입니다. 또한, 짧은 글은 압축하기 마련인데 압축하려면 군더더기를 없애야 하기 때문에 글의 예술성이 높아집니다. 

몇 글자로 쓸지는 각자 형편에 맞게 정하면 됩니다. 블로그나 카페에 올리는 글은 특별한 기준이 없습니다. 읽는 사람에 맞게 분량을 정하는게 정답입니다. 

글을 압축하기 위한 기술은 두 가지 입니다.

첫째, 문장을 되도록 짧고 간단하게 쓴다.

둘째, 군더더기를 없앤다.

문장을 짧게 쓰려면 복문을 피라고 단문을 써야 합니다. 하지만 뜻과 느낌을 강하고 확실하고 깊게 전하려면 복문을 써야 한다는 판단이 들 때만 복문을 쓰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군더더기를 없애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군더더기는 뭘까요?

첫 번째는 접속사.

-‘그리고’ ‘그러나’ 그러므로’ ‘그런데’ 같은 접속사를 넣는 것은 나쁜 습관입니다.

둘 째는 관형사와 부사

셋 째는 여러 단어로 이루어져 잇지만 관형어나 부사어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문자 성분.

이렇게 과감하게 덜어내면 뜻이 오히려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문장이 한결 깔끔해집니다. 놀리 글에서 중요한 것은 그런 화려함과 기교가 아니라 뜻을 간결하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문장의 효율성입니다.

지금까지 글쓰기에 대해서 한 이야기를 간추려보면, 글을 쓸 때는 주제를 뚜렷이 하고 꼭 필요한 사실과 정보를 담습니다. 사실과 정보를 논리적 관계로 묶어줄 때는 정확한 어휘를 선택해서 말하듯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표현한다. 중복을 피하고 군더더기를 덜어냄으로써 글을 압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독자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쉽게 써야 합니다. 쉬운 글이라고 해서 쓰는 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다른 정보가 없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텍스트를 쓰려면 철저하게 독자를 존중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전문용어나 이론을 끌어올 때는 문맥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도록 적당한 방법으로 설명을 붙여야 합니다. 글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수단입니다. 실용적인 면에서든 읽는 사람에게 고통과 좌절감을 주는 글은 훌륭한 소통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지식과 전문성을 내보이려는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왜 글을 쓰는가]

글쓰기는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내면에 무엇이 있으며 또 어떻게 그것을 표현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글쓰기는 두 가지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바로 그 특별함 때문에 사람들은 글을 잘 쓰고 싶어 하고, 또 글쓰기를 두려워합니다. 

첫째, 세상이 글쓰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때때로 쓰기 싫어도 글을 써야만 합니다. 학업과 진학, 취업을 위해서입니다. 직장에서도 일을 하면서도 글을 써야 합니다. 글을 잘 쓰지 못하면 사는 데에도 지장이 많습니다.

둘째, 사람들은 글 잘 쓰는 이를 부러워하며 심지어는 우러러 본다.

글쓰기 실력을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지성의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글을 잘 쓰려면 일단 표현할 내면의 가치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는 게 많아야 하고 다양한 어휘와 정확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잘 쓰는 것만으로 존경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읽는 사람이 글쓴이의 마음과 생각을 느끼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써야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글을 잘 쓰려면 왜 쓰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글을 써서 인정받고 존중 받고 존경 받고 싶다면 그에 어울리는 내면을 가져야 합니다. 글은 손으로,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체로 쓰는 것입니다. 논리 글쓰기를 잘하고 싶다면 그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논리 글쓰기를 잘하려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떳떳하게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 내게 이로운지 생각하기에 앞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고민해야 합니다. 때로는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술만으로 쓴 글은 누구의 마음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허공을 떠돌다 사라질 뿐입니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은 문명이 선사한 축복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한껏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것입니다. 이 축복과 특권이 좌절감과 열등감의 원인이 된다면 그만큼 불행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