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춥다_따뜻한돈이불이 필요해

골짜기의 밤

DiKiCHi 2017. 3. 21. 00:00

골짜기


그날은 차가운 날이었다. 
고된 행군은 끝났고, 쉬는 밤이 찾아왔다. 매우 피곤했다. 
골짜기 샘에서부터 시작된 바람은 돌고 돌아, 옆 줄기와 만나고 휘어져서 거대한 홍수처럼 주둔지를 덮쳤다. 모든 부대원들은 추위와 싸우며 흐트러짐 없이 잠을 지켰다. 
하얀 눈꽃이 야영텐트를 조금씩 덮어오고 있을 때, 형준이는 혼자 조용히 일어나 있었다. 
24인용 야영 텐트 안에는 난로 옆에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조심히 의자에 앉은 형준이는 난로로 얼굴을 내밀었지만 난로의 온기는 이미 눈꽃으로 덮인 지 오래이다. 
형준이에겐 마지막 혹한기다. 


하지만 전역에 대한 기대감보단 걱정이 앞섰다. 입대하기 전 아버지의 사업은 큰 위기를 맞았지만 아버지는 "괜찮다" 하셨고, 어머니의 기침은 계속되었다. 당장 복학은 꿈도 못 꿨다. 제대를 하면 알바를 먼저 해서 등록금을 마련해야 했다. 원망스럽기만 한 상황이었다. 우울한 상황이었다. 
24살인 형준이는 어른이고 싶었지만 모든 상황은 형준이를 어린아이로 취급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부모님의 도움은 아직도 필요했고, 혼자서는 어떤 것도 결정할 용기가 없었다. 한 인간으로 독립하고 싶지만 겁이 났다. 무엇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 했다. 3개월 뒤면 군대보다 혹독한 세상으로 나가야지만 형준이는 이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갑갑한 마음에 텐트의 문을 열고 나갔다. 


차가운 바람이 형준이의 가슴으로 들어와 눈꽃을 피웠다. 가슴이 시렸고 눈앞은 아찔했다. 비틀거렸지만 형준이는 얼른 몸의 중심을 잡았다. 
전깃불 하나 없는 골짜기 밤에는 달빛이 태양이었다. 달빛에 비치는 세상은 달랐다. 나무들, 자갈돌, 흐르는 시냇물, 그리고 형준이의 손이 희미하게 노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곳에는 눈꽃이 피어있었다. 눈꽃은 천천히 팔 안쪽으로 피어올라 목으로, 얼굴로 머리로 타고 올라 형준이를 덮었다.


"에-취!!"


형준이를 덮고 있던 눈꽃들이 가루가 되어 바람 줄기를 타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눈꽃이 사라진 곳에는 달빛만이 서려있다. 형준이 몸에서 달빛이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더 이상 춥지 않았다. 

형준이는 굳은 결심을 하듯 골짜기를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달빛이 비쳐주는 골짜기로.
한걸음 한걸음 거친 바람을 뚫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홀로 빛을 내며 사라졌다. 


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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