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다. 지친다. 의욕도 없다.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눈꺼풀은 무겁다.
좀만 더 눕자. 눕자.. 눕자...
제주도로 떠났다.
도착한 제주도는 초 저녁 구름이 하늘 덮어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제주도 특유의 강한 바람이 불어 내 머리는 흐트러트린다.
네모난 서류 가방 하나 들고 알 곳 없는 곳을 걷다 보니, 작은 상점 서너 개가 바다를 마주하는 곳으로 도착했다.
한적한 좁은 도로에는 바람만이 달리 있었고 상점의 불은 꺼져 있었다.
좀 더 가까이 가서 보자. 작은 시골 슈퍼집 같아 보였다. 윤기가 나는 나무들이 양 끝기둥으로 서있고, 깔끔하게 시멘트로 마감이 되어있었다.
깔끔하면서도 세련되게 치장되어 있었다. 그중에 가운데 상점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정사각형의 나무로 틀을 만든 간판이었는데, 가운데는 불이 나오고 간판에는 'DK 하우스'라는 글이 쓰여있었다.
의아했다. 내 이름이지 않은가.
상점 정면에 있는 창문으로 가게 안을 둘러봤다. 나이 지긋한 사장님이 계신다. 가게는 어두웠고, 손님은 아무리 봐도 없었다. '
이런 곳이 장사가 되겠어? 망했구먼' 생각했지만, 호기심을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10평도 안되는 가게였고, 작은 테이블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나는 맨 안쪽에 상점 뒷길이 보이는 창문에 앉았다.
메뉴를 보니 연근 비빔밥이 보였다.
사장님께 나지막하게 말했다.
"연근 비빔밥 하나 주세요"
사장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며 주문을 받으셨다.
가게 안을 둘러봤다. 왠지 이곳이 낯설지가 않았다.
가게 안에 영업용 냉장고의 위치가, 나무로 된 계산대의 모양이, 그리고 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닷가 풍경이.
요리를 하시는 사장님도 왠지 아는 사람 같았다.
연근 비빔밥이 나왔다. 얼굴을 파묻고 숟가락으로 퍼먹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들어와 내 옆 테이블에 앉았다.
신경 쓰지 않고 나는 내 할 일을 했다. 생각보다 아삭한 식감이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고개를 들었을 때 놀랐다.
많은 사람들이 가게 안에 부쩍였고, 어두운 가게는 어느새 따뜻한 주황 불빛과 활기 넘치는 사람들로 테이블은 다 채워져 있었다.
밝았다. 따뜻했다.
'와. 여기 핫 플레이스였구나. 맛 집인가?' 생각이 들었다.
옆 테이블에 앉은 낯선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 맛 집이에요?" 하고 물었다.
"이 집 원래 사람 엄청 많아요."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뒷 창문으로 보이는 오솔길을 가리켰다.
"저 길로 쭉 따라가면 좋은 곳이 많아요. 안 가보셨으면 한번 가보세요."
'웬 오지랖이람' 생각했지만 미소를 지으면 테이블을 나왔다.
카운터에서 현금 내밀었다.
"계산요."
주인아저씨는 내 눈을 마주 보셨고 따뜻한 미소를 보이시면 거스름돈을 주셨다.
따뜻한 미소였다. 선한 눈빛이었고, 묵직한 손이었다.
밖으로 나와 뒤돌아보니 불빛에 쌓인 가게는 참으로 멋있었다.
DK 하우스 간판은 환하게 빛났고, 창문으로 보이는 가게 내부는 정겨운 시골집 같았다. 왠지 다시 들어가면 따뜻한 밥 한 공기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창문가에서 서성이시는 사장님도 어둠 속에서 봤던 망해가던 사장님의 얼굴이 아니었다. 활기차고 인심 좋은 옆집 아저씨의 얼굴이었다.
을씨년스러운 느낌과 강한 바람은 어디 온데간데없고, 놀이공원 야간 개장을 온 듯이 부드럽고 따뜻한 분위기가 곳곳에 퍼져있었다.
'여기 익숙하다. 내 손에 든 가방도, 노란 불빛도. 뭐지.. 들어갈 때는 모든 것이 낯설고, 나왔을 땐 모든 것이 익숙하다.'
깊히 숨을 마셨다.
'따뜻하다. 따뜻하다. 따뜻하다'
배가 고프다. 망설임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 사장님께 주문을 했다.
"연근 비빔밥 하나 맛있게 비벼주세요!"
오랜만에 고향에 온 듯, 따뜻하고 포근한 분위기가 날 감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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