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늑대는 이동진, 김중혁 작가의 <질문하는 책들>에서 소개하는 책 중에 하나 입니다.
<질문하는 책들> 읽을 때는 그렇게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도서관에 꽂혀져 있는 <철학자와 늑대> 보니 가볍게 읽기 좋겠다는 생각으로 집어 들었습니다. 앞 서문만 잠깐 봤습니다. 서문만 봐도 작가 마크 롤랜즈가 얼마나 글을 잘 쓰는지 느껴지더군요. 차분하면서 담담하게 쓴 글이 마음에 스윽 스며들었습니다. 늑대와 살면서 느꼈던, 깨달았던 이야기들을 철학적인 이야기와 잘 버무려 이야기 합니다. 자연의 것을 인간 세계로 데려와 사는 것이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의 위선처럼 보이지만 이것을 마크 롤랜즈는 이것을 철학적으로 '핑계'를 잘 대던지 훌륭했습니다.
반려견, 반려묘를 키우시는 분이라면 꼭 한번은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요즘처럼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은 적은 없지만 반대로 요즘처럼 동물을 학대하고, 버리는 사람이 많은 적도 없습니다. 동물을 키운다는 것을 쉽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철학자와 늑대>에서 나오는 인간의 오만함과 잔인함은 결코 남들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일임입니다. 개통령인 강형욱님의 말이 떠오릅니다. "주인은 변하지 않으면서 반려견이 자신에게 맞추기를 기대한다". 동물을 키우시는 분이라면 동물의 실존적인 존재로 인정해주고 거기서 발생하는 희생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마크 롤랜즈처럼 하지 않는다면 키우지 않는 것이 좋겠다'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절대 키우지 않을 겁니다.
<철학자와 늑대>를 다 읽고 나면 철학적인 내용은 좀 머리 속에서 사라지고, 늑대와 작가의 우정이 가슴 깊게 남습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이 있고, 감동을 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늑대를 떠나보내는 작가의 이야기는 너무 슬펐습니다. 그러면서 약간의 힐링도 됐습니다. 잔잔한 감동을 주는 책이지만 철학적인 이야기는 좀 더 저에게는 신선했습니다. 늑대와 함께한 에피소드에서 철학적인 내용을 연결하는 것이 작가의 훌륭한 능력인 것 같습니다. 책의 내용을 다 소개는 못하겠지만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들만 간추려서 철학적인 이야기들 위주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철학자와 늑대> 책은 '브레닌'이라는 늑대와 마크 롤랜즈의 11년간의 동거동락한 이야기 입니다. 늑대와 함께 살면서 느끼는 인간에 관한 철학적인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크 로랜즈는 늑대를 키움으로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나의 늑대가 되어줄래?
첫 번째로, 처음 브레닌을 만나 작가는 늑대를 훈련 시키는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개와 늑대는 다릅니다. 개는 훈련 받는데 탁월하지만 늑대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탁월하다고 합니다. 늑대는 훈련하기가 적합하지 않지만 작가는 몇 가지 늑대에게 기본적인 규칙을 훈련 시킵니다.
가!: 냄새를 맡아.
멈춰!: 거기 서있어.
이리와!: 나한테 와
나가!: 혼자 있고 싶으니 나가 있어.
그러나 훈련된 개처럼 바닥을 구르던지, 앞발을 내밀라는 요구를 브레닌에게 요구하지 않고 브레닌이 알아서 결정한 것을 받아 줍니다. 소파를 물어 뜯던 집안 용품을 부수던, 집이 쑥대밭이 되어도 자연스럽게 받아줍니다.
필요한 것, 불필요한 행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1. 어떤 사람들은 개를 훈련 시키는 것, 늑대를 훈련 시키는 것은 동물의 본능을 모두 꺽어 가축처럼 만드는 잔인한 행위라고 문제를 제기합니다.
여기서 작가는 <프리드리히 니체>가 한 말을 인용합니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신 통제해 줄 누군가를 빨리 찾아야 한다는 것은 엄연한 진실이다.』 『규율은 가장 소중한 자유의 형태를 가능하게 한다. 규율 없이는 잠시 허가된 자유일 뿐,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늑대에게 몇 가지 규칙을 정해주는 것은 통제자가 되어 브레닌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기 위함이었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2. 또 어떤 사람은 '어떻게 자연 속에 살던 야생동물을 데려다가 전혀 자연스럽지 못한 생활을 강요할 수 있는냐?' 비난합니다.
<장 폴사르트>는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정의합니다. 인간을 잘 정의한 말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지배하며,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선택하고 종교, 도덕, 과학 등이 정해 놓은 기존의 규칙이나 원칙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태어난 존재인 것이죠.
그러나 반대로 인간을 제외한 다른 존재들은 주어진 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 입니다. 늑대는 사냥하고 무리지어 사는 동물로 진화했다면 그렇게 살아야하며, 시간이 끝없이 흘러도 늑대는 자신의 존재를 지배할 수 없다고 말이죠. 늑대는 '본질은 실존에 앞선다'. 늑대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함이라고 작가는 반박합니다. 꼭 '늑대가 자연속에서만 살아야한다'는 생각하는 것은 늑대의 실존을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늑대가 같이 사는 것을 선택하고 마크 로랜즈를 좋아한다면 이 선택도 존중해줘야 합니다.
브레닌은 노예인가? "나도 7년간 학교를 다니고 3년은 메사추세츠, 2년은 옥스포드 대학에서 지내면서 내 교육 조건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정해졌는데, 그렇다면 나도 노예인가? 우리 모두가 노예라면 주인은 누구인가? 주인이 없다면 누가 노예인가?
너에게 길드니, 사람이 보인다.
1. 악은 의외로 평범하다.
마크 로랜즈는 실험견에 대해서도 자신에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왕복 상자>는 솔로몬, 카민, 와인이라는 하버드대학의 심리학자들이 개발한 도구입니다. 이 상자는 울타리 구획을 둘로 나누고 각 구획은 전기가 통하는 석쇠 바닥으로 되어있습니다. 솔로몬과 동료 실험자는 한쪽 구획에 개를 넣고 바닥에 강한 전기 충격을 주었습니다. 본능적으로 반대편으로 넘어 갈려고 하지요. 하지만 점점 울타리를 높게 하면서 개가 뛰어넘기 어렵게 만듭니다. 결국 넘을 수 없을 때 계속되는 전기 충격에도 개는 넘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충격에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실험은 우울증의 원인이 절망의 반복학습이라는 '학습된 무기력' 모델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30년간 다른 동물들에게 전기 고문을 가한 결과, 이 모델은 잘 못된 것이라고 결론이 났습니다.
이 실험은 최소한 인간의 사악함을 증명하는 데에는 성공한듯하다.
현대적 악의 개념에서 중요한 두 가지 내용은 <악한 사람이 필요하고, 악한 사람은 악한 동기에서 행동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어디가 아프거나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해 자신의 동기를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행동 역시 통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악한 행동과 악한 동기 사이의 이러한 상관 관계는 중세 토머스 아퀴나스까지 올라갑니다.
그러나 마크 로랜즈는 다릅니다. 악행의 동기가 있든 없든, 악행이라는 것을 알든 모르든,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고, 그 악행으로 일어난 참혹한 결과를 통해 사악한 행동임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악의가 악한 행동의 실행에는 거의 상관이 낮다는 것입니다. 악의 평범성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의지의 부재로 도덕적, 인식적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 세상 속 악의 본질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기고문을 한 솔로몬과 그 동료들의 동기가 어떠하든 생명체를 인간이라면 상상조차 못 할 고통에서 지켜 주어야 하는 도덕적 의무를 소홀히 한 것입니다.
인간의 선에 대해서 소설가 밀란 쿤데라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진정한 인간의 선은 아무런 힘이 없는 자들을 대할 때 순수와 자유로움 그 자체로 나타난다. 가장 극단적이고 너무나 심오하여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진정한 인간성의 도덕적 시험은 힘없는 동물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너무나 근본적이어서 다른 모든 이들이 무감하게 따라하게 되는 인간의 근본적인 직무유기가 여기에 존재한다.』
마크 롤랜즈는 항상 약자에 대한 태도를 보고 사람을 판단한다고 합니다. 돈 많은 손님이 식당 종업원을 어떻게 대하는지, 상사가 부하 직원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말이죠. 절대적으로 힘이 약한 무력한 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을 거의 다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쿤데라가 말했듯이 가장 무력한 존재는 바로 동물입니다. 동물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2. 나는 과연 가치 있는 존재인가?
『40억 년의 맹목적이고 생각 없는 우주의 발전 끝에 우주는 브레닌을 창조해 냈다. 그리고 인간을 창조했다. 그렇다면 브레닌과 인간 중에 누가 더 가치가 있는가?. 』 이러한 질문은 인간만 할 수 있다면, 실존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이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말들을 합니다.
작가는 우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합니다. 복잡한 논리나 개념적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작가 자신이 브레닌보다 우월하지만 달리기에 있어서는 브레닌이 더 우월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둘 중 어떤 것이 더 우월한 기술인가요?.
우월성을 이해할 때 효용성을 따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동물들은 각각 필요한 형태로 진화했고 그 형태마다 더 우월하거나 효용이 큰 기술이 다름으로 상대적입니다.
인간은 이성이 치타의 빠른 속도, 늑대의 지구력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근거로 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행복이란게 토끼보다 좋은 거야?
작가는 점점 인간 세상에서 멀어지고, 세상에 염증을 느꼈습니다. 좀 더 시골로, 도시에서 먼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브레닌과 또 다른 반려견인 니나가 뛰어다니기 좋은 곳으로 들어갔죠. 작가는 <동물권>을 집필한 후 사냥이나 식용으로 동물을 죽이는 것을 반대했고, 도덕적 채식주의자의 길을 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죄 없는 브레닌도 고기 대신 생선을 먹이더군요.
1. 행복에 중독된 세상
시골에서 외풍이 들고 추운 집에서 세상을 등진 마크 로랜즈에게 부모님은 걱정스럽게 "그렇게 사는 게 행복하니?"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렇다면 행복은 무엇일까요.
많은 철학자들은 행복의 본질적 가치를 주장합니다. 행복은 효용이나 역할이 아닌, 그 자체로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하나의 감정으로 생각합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행복은 특정 방식으로 '느끼는' 것 입니다.
잘 살고 못 사는 문제와 상관 없이, 삶의 질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달려 있는 것이다.
행복 중독자는 약물 중독자처럼 실질적인 도움을 주거나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끊임없이 갈망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행복 중독자는 더 심각합니다. 자신의 행복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고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년기에는 술이나 마약, 이성이 주는 즐거움을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나이가 들면서 노골적인 쾌락과 퇴폐적인 감정을 넘어서, 부모로써 자녀를 바라볼 때의 정제된 감정 같은 행복의 관념을 확장 시킵니다.
행복의 범주에 포함 시키려는 감정이 다양해지는 만큼 인간은 점점 세련되어집니다. 행복이 무엇이든 그것은 감정입니다. 다른 동물은 감정을 쫓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감정에 집착하죠.
2. 행복은 감정이 아니야.
브레닌에게 행복은 무엇일까. 늑대에게 중요한 것은 교미할 때 즐거움 같은 감정이 아닙니다. 인간과 달리 늑대는 감정을 쫓지 않고 그들은 토끼를 쫓습니다. 브레닌이 사냥할 때, 가장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긴장의 고통과 정신과 신체의 의도적인 경직을 견뎌야 합니다. 가장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행복이라면, 이 행복은 황홀경이라기보다 고통입니다. 행복은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매우 불편하기도 하지요. 고생해 보지 못한 사람은 좋은 일이 생겨도 그 가치를 모릅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불편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행복 자체가 불편함을 끌어안고 있는 것입니다.
즐거움과 불편함이 하나 되어야 완전한 행복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잔디밭에 앉아 브레닌이 토끼 뒤를 몰래 쫓는 모습을 보면서, 작가 역시 삶 속에 감정이 아니라 토끼를 쫓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가장 좋은 순간, 우리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은 순간은 즐거운 동시에 몹시 즐겁지 않다. 행복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감정에 초점을 맞추면 요점을 놓칠 것이다. 때로는 삶에서 가장 불편한 순간이 가장 가치 있기도 한다. 가장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도 가장 가치 있는 순간이 될 수 있다.』
아직은 너를 보낼 수 없어.
작가로써 마크 로랜즈는 잘나갔습니다. <SF철학>는 전세계의 거의 모든 출판사에서 잘 팔렸고 해외 판권료가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작가는 프랑스에서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 랑그도크 중심에 있는 작은 집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나 한 달여부터 브레닌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브레닌 비장에 종양이 생겼고 점점 상태는 악화되었습니다. 항문에서는 피와 고름이 나왔고, 마크 로랜즈는 치료부위를 소독하고 주사를 놓기 위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브레닌을 돌봤습니다.
1. 사랑의 얼굴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개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분명히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곪아서 냄새가 나고 감염으로 엉망이 된 엉덩이를 한 달 넘게 두 시간마다 씻기기 전까지는 모를 일이다.』
브레닌이 죽어가고 있을 때 작가가 느끼는 감정은 혼돈의 상태였습니다. 『모든 감정이 강력했고 일부는 거의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어떤 감정도 브레닌에 대한 나의 사랑과 그럴듯하게 동일시되지는 못했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사랑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필리아>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것은 가족애이자 동료애입니다. 필리아는 에로스나 아가페와 구별되고, 이것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여러 얼굴이 있습니다. 사랑한다면 그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 합니다. 본질적으로 필리아는 우리가 인정하고 싶어하는 것보다 훨씬 가혹하고 잔인하기에. 필리아의 꼭 한 가지 필요조건은 감정이 아닌 <의지>입니다.
동료에게 느끼는 사랑인 필리아는 그에게 무언가를 해 주려는 의지이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아도, 그로 인해 소름 끼치고 메스꺼워져도, 결국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대가를 치르지라도 그렇게 하려는 의지 말이다.
시간은 롤렉스 시계가 아니잖아.
결국 '우리 꿈에서 다시 만나자'라는 말과 함께 브레닌은 안락사 되었습니다. 마크 로랜즈는 둑에서 돌덩이를 가져와 돌 무덤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장작불 피우고 2L짜리 잭다니엘로 밤을 지세웁니다. 사후세계에 대한 묵상으로 시작되었던 것은 신을 향한 분노로 폭발하면서 독설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리 나와 봐! 하나님은 개뿔! 영생? 그딴 게 있다면 당장 살려내! 왜 못 살려내? 지금 살려 내란 말이야" 절규 했습니다. 그때 마크 롤랜즈는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불 속에서 돌로 만들어진 브레닌 유령을 본 것이죠. 환각처럼 보이지만 술에서 깼을 때도 브레닌의 유령은 계속, 그리고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1.너 없는 하늘 아래, 네가 잃은 것을 찾다가.
『브레닌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달을 쳐다보며 울부짖고 하나님을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 그야말로 이 미친 상태는 내가 많은 것을 잃었음을 보여주었다.』
죽음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나쁜 것일까요? 주변의 존재들이 아닌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 자신에게 말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죽음이 삶의 한계라고 규정했습니다. 죽음이 무엇이든 간에 삶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아닙니다. 에피쿠로스 또한 죽음이 우리를 해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죽음은 살아 있는 동안 닥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삶에 속한 사건이 아니라 한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으면 해칠 대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죠. 적어도 당사자에게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는 보편적인 합의하에 이런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이 훼손하는 것은 우리들의 수많은 <미래의 가능성>입니다.
2.인생 최고의 순간.
만약 삶의 의미가 행복도 아니고 목적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일까요? 도대체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요?.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소유라고 가정해 봅시다. 삶의 의미가 소유할 수 있는 무언가에 있다는 생각은 추측하건대 무엇인가를 쟁취하려는 영장류적 영혼의 유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영장류에게 소유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한 것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늑대에게 중요한 것은 소유의 사실이나 소유의 정도가 아닙니다. 늑대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늑대가 되느냐 입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자 배우기 어려운 교훈은, 삶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소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의 피조물이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순간>에 있습니다. <순간>은 욕망하는 대상을 소유하기 위해 손을 뻗쳐 통과해 버리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소유는 <순간들>을 지워버리는 것을 전재로 합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우리는 시간의 피조물이지, <순간>의 피조물이 될 수 없습니다. <순간>은 우리가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항상 빠져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살면서 만나는 몇몇 <순간>들, 이 특정한 <순간>의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삶에서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 순간들이 바로 인생 최고의 <순간>인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조건반사처럼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기분 좋은 감정을 느끼는 것, 즉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고의 순간은 필연적으로 해탈과 같은 강렬한 환희를 경험하는 기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오해입니다. 오히려 최고의 순간에는 기분 좋은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가장 불쾌한 순간, 우리 삶이 어두운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고의 순간은 우리가 최고의 역량을 발휘할 때이며 이는 곧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 매우 끔찍한 순간들을 감내해 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능력과 성실함과 행운으로 이루어 낸 모든 것들은 결국 다 사라지고 만다. 시간은 우리의 힘, 욕망, 목표, 계획, 미래, 행복과 결국에는 희망까지 앗아 갈 것이다. 하지만 최고의 순간에 실재하는 내 모습 만큼은 시간이 결코 앗아 갈 수 없다.
브레닌과 마크 롤랜즈 사이에서 일어난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저는 철학적인 내용을 중점으로 봤습니다. 우리 인간에 대한 고찰들, 삶에서의 최고의 순간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 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인간은 감정적인 것을 모든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다는 것에 세삼 놀랐습니다. 암흑 같은 시기을 보낼때는 모든 것이 괴롭고 힘들었지만, 훗날 뒤돌아 봤을 때 그 시간이 내가 발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구나라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모든 부정적인 감정적이 휘몰아쳤지만 그때가 저의 최고의 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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